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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2011/04/18 12:45 | Posted by 하늘날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책도 글쓴이의 직업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책에 대해 논하기 전에 작가에 대해 짤막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책의 작가는 김경일이라는 사람으로 10살때부터 한자와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고 국민대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후 타이완 중국 문화대학 중문연구소에서 세계적 고대문자 학자인 쉬탄훼이 박사에게 고대문자와 갑골문을 배웠다. 현재는 상명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책은 한국인으로 사는 열가지 괴로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일본이여 들어오라! 중국이여 기다려라!, 공부는 끝났다, 한국인을 넘어서라는 5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한국인으로 사는 열가지 괴로움

이제 정치인이 대표가 되는, 나라로서의 국가 대표팀은 끝났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져버렸다. 우리의 시대는 이른바 4I로 대표되는 산업(Industry), 투자(Investment), 개인(Individual), 정보(Information)로 구성된 시대로서 이제 서로에게 이익만 된다면 우리들이 어떤 국적을 가졌건 어디서든지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나라는 우리것만을 주장하고 있다. 신토불이라는 말을 앞세워서 수출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수입은 신토불이 조항 때문에 언제나 조심스럽다. 우리 사회의 ‘신토불이’에는 일종의 기피증과 문화적 폐쇄성이 교묘하게 숨어있다. 이제 우리도 ‘우리 것’에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사회는 유난히 회식을 즐기는 나라이다. 이렇게 한국인들이 회식을 즐기는 이유는 공돈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 내에 공돈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먹자’는 공범 심리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이런 공짜를 좋아하다보니 집을 짓고, 다리를 짓고, 백화점을 짓을 때 시멘트도 조금 덜어내고 철근도 조금 잘라내는 것이다. 이제 아시아에 더 이상의 호랑이는 없다. 세 개의 클린 국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일본, 싱가포르, 타이완 같은 깨끗한 정부가 이끄는 나라들이 무너지는 한국을 딛고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출세해야 산다’는 우리 한국인들이 벌이는 서바이벌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다. 우리 역사에는 뜻을 이룬 사람들이 참 많다. 이성계가 그랬고, 이완용이 그랬고, 이승만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나라의 문을 열었고, 그들의 행동은 모두 ‘추인’되고 이성계 이후 모든 과정은 ‘결과’를 통해 속죄될 수 있었고, 큰 도둑이 될수록 칭송은 더욱 자자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길로 가든 출세해야지만 살수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대적 변환의 저변에 흐르는 새로운 질서를 우리는 꺼내보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흐름 속에는 개인적 삶의 자유와 창조적 공간, 맑은 환경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보기에 대단히 아름다워 보이는 이 질서 안에는 사실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 이제 모두 몸과 마음의 문을 열과 함께 삶을 이야기해보자는 이 질서 속에는 어느 한 지역 문화의 ‘성스러움’이나 ‘순수’가 그들만의 원시적 가치로 남아 있도록 놔두지는 않겠다는 ‘열어야’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제 그 흐름 앞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게 될 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특히 무역과 교류, 금융 자본의 빠른 교류가 지역의 평화나 유대감을 조성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사회 과학적으로 이미 밝혀진 사실 아닌가? 우리가 얻어맞은 IMF의 미사일과 이라크에 쏟아진 토마호크 미사일은 전혀 다를 바 없는 동질의 무기다. 단지 화약 냄새가 진동하지 않을 뿐 사회와 가정이 풍지박살나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가히 유례가 없을 만큼 문명적, 사회적 상호 의존도가 깊어지고 확산되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옛 모습만을 간직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 것을 지금 보호하지 않음 그 흐름 속에서 가을 낙엽처럼 흔들리고, 해변에 쌓은 모래성처럼 씻겨가고 말 것이라는 비장한 읊조림과 함께 말이다. 이제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특히 우리 것에 대해 냉정해져야 한다. 버려야 할 것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을 차분히 골라내야 한다. 더 이상 새로운 세계의 흐름인 문화의 다원주의 앞에서 우물쭈물해선 안된다. 국경의 선이 희미해지고 문화적 교류와 혼합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과 그 한편에서 분출되고 있는 각 개인의 창조적 공간과 자유스러운 삶의 욕구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문화적 유연성은, 이제 더 이상 몇몇 지식인들의 한가로운 시간 죽이기 대상만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 거대한 세계적 질서 앞에서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쇼비니즘적인 맹목적 민족주의가 우리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제2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우리 사회에 더러운 부유물처럼 떠 있는 목소리와 주장과 구호와 이념들 밑에 도사리고 있는 유교적 권위, 그리고 그것 앞에 엎드리는 타협, 그래서 만들어지는 불공평과 불투명함들. 그 본질들을 해제하고 찢어내고 씻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들 삶의 나무는 가지를 뻗지 못할 것이며 푸른 잎이 돋아나지 못할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끼나 버섯처럼 칙칙한 그늘 밑에서 잠시 돋아났다가 스러지고 말 것이다. 이제 알고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우리사회 곳곳에 검은 공팡이처럼 자라고 있는 유교의 해악을 올바로 찾아내고 솎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이런 유교의 해악을 찾아낼 기회가 없었다. 한일합방, 해방, 전쟁, 쿠데타, 지역 싸움, IMF 등등 정신을 차릴수 없을 만큼 떠밀려 온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100년도 더 늦은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아직도 그것을 끌어안고 나름의 방법과 위안을 찾는 우리의 어리석음은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문화란 카멜레온보다도 민감하게 주변에 반응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의 집합체다. 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이 새로운 외부환경에 적합하도록 유연하고 탄력있게 변해갈 때 그 문화는 더 건강해지고 매력적인 것이 되어 주변으로 쉽게 확산된다. 그러나 멍청이들로 가득해 새로운 세계의 패러다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시름시름 썩어갈 때, 내부에는 혼란과 기만이 가득하게 되고 외부의 건강한 문화체의 공격을 받아 심한 타격을 입거나 때론 절명하고 만다. 이제 한국사회를 지탱해온 유교 문화의 수명은 끝났다.

IMF가 터지기가 무섭게 사회 전반에 박정희 신드롬이 일었다. 근면과 희생과 절약의 미덕 말이다. 문제는 미래 사회로의 진입 실패에 있는데 답은 박대통령의 관 뚜껑을 열어 꺼내고 있었다. 이는 우리 사회 전반에 드리운 과거 지향의 정서가 다시 한번 터져나온 것이다. 한국인들 뇌리 속에 너무도 강렬하게 뿌리내린 ‘온고지신’의 강박관념이 다시 한 번 설교를 시작한 것이다. 이런 ‘뒤돌아보기 문화’로 인해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미래를 보는 눈을 갖지 못했다. 종갓집 맏며느리는 새해가 다가오면 그 해에 지내야 할 제사의 음력 날짜부터 헤아려 달력에 수십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넣는다. 이미 새로운 1년은 과거로 가득 차버리고 내일은 어제의 장례식 기억을 되살리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신의 인생은 없는 것이다. 또 기껏 미래를 위한 행동이라고 해봐야 묘자리 미리 봐두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늘 미래를 꿈꾸어도 아름다운 내일을 만들어 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구성원 거의 모두가 늘 어제와 과거를 기억하며 살아온 이 사회. 이들이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는 미래 사회를 올바로 예측하고 적응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노새가 언젠간 귀여운 당나귀를 분만하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만큼이나 순진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유교 문화는 조용히 움직여 그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자체를 부식시켜 마침내 붕괴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마치 가랑비처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차츰차츰 사회구조를 부식시켜 마침내 끔찍한 붕괴를 초래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갑자기 닥친 재앙이며 네 탓이라고 야단법석이다.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붕괴의 원인이 유교 문화 내부에 있었던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한 이유는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이 흔히 ‘도덕’의 깃발을 다시 힘차게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힘’의 사용이 상식과 법, 그리고 구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시스텀 속에서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프로그램, 즉 유교 문화가 만든 권력 구조 속에서 발생했음에도 다시 한 번 도덕으로 돌아가라는 호들갑과 함께 다시 유교 문화 속으로 스스로 기어드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데 있다. 도덕의 깃발을 힘차게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그 사회는 다시 확실한 붕괴의 사이클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뇌리속에 자리잡은 효도는 완전히 일방적 게임이다. 겉보기에는 따뜻한 정이 이고, 가정의 화목을 지탱해가는 아름다운 미풍 양속처럼 보인다. 물론 한때는 가정의 따뜻함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역기능의 해소에 관심을 기울이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되었다. 효도는 자식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해드려야 하는 일방적 희생의 위험 부담이 있는가 하면, 받는 사람도 자신의 처지에 걸맞는 적절한 처방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희생당하기는 마찬가지다. 효도는 그것을 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에게 있어 적절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무한 책임론이다. 이런 맹목적인 효도의 이름 아래 적지 않은 노인들이 방안에 수감되어 있든지 아니면 원치 않는 손주들까지 봐야 하는 사회 봉사(?) 명령까지 받고 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그들은 손주들 뒷바라지를 즐기지 않는다. 많은 젊은이들이 노인들이 내 아이를, 즉 손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노시면서’ 아이들을 봐주시기를 희망한다. 때로는 이것을 효도의 한 덕목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인들도 노인들의 인생이 있다. 그들도 부부끼리 뽀뽀하고 싶고, 여행하고 싶고, 맛있는 것 먹고 싶고, 좋은 옷 입고 싶다. 그러나 효도가 이들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대를 모든 일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가볍고 건강하게 마무리할 삶의 권리가 있다. 경제 문제 다음으로 심각한 것이 노인들의 여가활동 문제라는 지적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해 보인다.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사회적 의미에서의 노인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각 개인에게 적어도 20년, 30년의 노년기가 주어진다는 의미인데 , 이 기간 동안 손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치매환자들이나 중병환자들의 간호까지도 효도의 미명 아래 모두 가정에서 해결할 것을 이 사회는 강요하고 잇다. 양로원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주거 지역마다 전문간호사와 레크리에이션 담당자가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노인들이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 까? 물론 가족들은 수시로 드나들 수 있고 손주들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다. 노동력을 잃은 노인들의 노후문제는 진작부터 사회가 맡았어야 할 숙제였다. 서구의 양로원을 비웃으며 효도의 가치를 자랑스러워하던 우리 사회의 노인들. 이제 그들의 처지는 한여름 노래를 부르던 베짱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노인의 85.9% 이상이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효도가 아닌 구체적 의료서비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현재 약 30만명의 양로 간호사를 국가 차원에서 배출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노인들에게 식사를 배달하도록 하겠다는 소식은 한없이 우리를 부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인들은 양로원이라는 말 대신 ‘노인의 홈’이라고 부른다. 장애자를 ‘첼린지 맨’으로 불러주듯이. 바로 이것이다. 노인들의 문제는 효도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 사회에서 제도와 설비와 관심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제도와 설비 마련에 더딘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우리 사회가 이제껏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숭상해왔던 효도에 대한 터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가슴속에서 거품처럼 부글대는 이 문제를 숨기면 숨길수록 희생자는 점점 많아져간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효도의 이름 아래 빚어지는 억지가 아니다. 노인과 자녀들 모두의 사랑이 상처를 입지 않을 균형 있는 제도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빚어낼 수 있는 일종의 예술품일 것이다.


제3부 일본이여 들어오라! 중국이여 기다려라!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늘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식칼이다. 손잡이가 있고, 날 달린 모습이 똑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의 도시를 다니다보면 칼만 파는 가게들을 볼 수 있다. 두어 평 남짓한 가게의 벽면에 번쩍이는 칼들을 쫙 꽂아놓은 것이 조금 으시시해 보이지만 칼마다 새겨놓은 장인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의 책임의식과 프라이드를 함께 느끼게 된다. 또 여기가 틀림없는 사무라이의 고향이구나 하는 느낌도 빼놓을 수 없다. 3국의 칼 중에서 일본의 칼이 제일 깨끗하고 폭이 좁다. 또 제일 뾰족하고 길어 전체적으로 긴 삼각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거의 면도날을 연상시킬 만큼 일본인의 식칼은 예민해 보인다. 그것은 살아서 펄펄 뛰는 생선을 빠르게 제압하는 데 유용함과 동시에 흐물흐물한 생선의 살을 조각내고 다듬기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의 식칼은 일본인들의 식칼에 비하면 차라리 도끼다. 4×6배판 책만한 크기의 사각형의 시커먼 날, 그리고 칼의 두툼한 두께. 뭉툭하고 짧아 손안에 딱 들어가도록 만든 손잡이로 광어회를 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건 질기고 질긴 돼지 비계와 갈비를 통나무 도마위에 놓고 턱턱 끊어내는 데 잘 어울리는 칼이다. 묵직한 무게 때문에 위아래로 손목을 흔들며 내리치면 도마가 푹푹 파이면서 비계와 뼈가 끊어진다. 비계 달린 살코기를 애들 주먹만하게 쿡쿡 썬 뒤 날에 담아 기름솥 안으로 휙 하고 던져넣기 편리하도록 만들어졌다. 한국인의 식칼은 중국인의 식칼과 일본인 식칼의 딱 중간 형태다. 크기를 그저 늘 우리가 먹는 자반 고등어만하고, 형태 역시 사각형도 삼각형도 아닌 두리뭉실형이다. 칼등은 중국 식칼을 닮았고, 날은 일본칼과 비슷하지만 끝이 휘어져 올라가 버선코를 닮았다. 또 날은 면도날처럼 예리하지도 않고 도끼처럼 무디지도 않다. 적당히 예리하다. 그래서 이 식칼은 돼지고기를 자르기에는 힘이 부치고, 생선회를 뜨기에는 너무 거칠다. 이건 그저 배추나 무를 썽둥썽둥 썰기에 적합하다. 두 쪽으로 쪼개면 되는 배추를 위해 도끼를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돼지고기처럼 질기지도, 생선처럼 흐물대지도 않는 무는 대충 이리저리 치다보면 깍두기가 된다. 대한민국 식당 어디를 가도 한 접시안의 깍두기 크기가 고른 것을 먹어보지 못했다. 그저 대충 치면 그만이다. 깍두기를 위해 면도칼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화적 행동 양식은 가치관에 영향을 주고, 그 가치관은 다시 활동에 필요한 공구 등의 생산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한중일 세 자루의 식칼은 세 나라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대변하는 상징물들이다. 세 가지 다른 식칼로 만든 음식 또한 서로 다른 문화적 퍼스낼리티를 선명하게 나타낸다. 중국 조리법의 대표는 ‘차오’다. ‘차오’란 볶는다는 뜻으로, 거칠게 토막을 낸 돼지비계를 넣고 야채와 착착 볶아내 커다란 접시 위에 던지는 중국 요리는 중국인들의 실용적이고 감각적인 특징을 잘 대변한다. 이 요리는 요리사의 감각과 생각에 따라 맛이 좌우되어 먹는 사람이 개인의 기호를 첨부할 기회가 없다. 그저 주면 먹어야 한다.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기껏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많이 먹고 적게 먹는 양의 조절뿐이다. 좋게 말해서 대국적이고 나쁘게 말해서 다소 오만한 말투며 태도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 돼지기름으로 범벅이 된 음식은 둔탁하면서도 불투명한 중국 문화의 정서를 그대로 투사해내고 있다. 여간해서는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그들의 미끄덩거리는 정서야말로 ‘차오’가 감춘 진면목이다. 일본 요리의 대표는 잘 알다시피 ‘사시미’다. 살아 있는 생선의 살을 얇게 저며 먹도록 한 회는 일본인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요리다. 생선살의 결을 고려하는 칼질, 부위별로 나누어 그 맛의 차이를 예민하게 느끼도록 만든 설계, 여기에 각종 소스를 개인별로 두어 자신의 취향을 가능한 한 살리려는 배려가 회에는 들어있다. 더구나 회는 자연 그대로의 음식이다. 어떠한 조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먹는, 각자의 개성이 첨가된 공간이 확보된 음식이다.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자기의 창조 공간에서 마음껏 자기 실현을 맛보는 음식이다. 쓰시는 또 어떤가? 조그만 덩어리 안에는 밥고 밥을 보조하는 온갖 종류의 반찬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색색의 반찬들은 칼로 잘라 단면을 노출시켰을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지 검증이 가능한 상태다. 뒤가 없는 일본인들이 진솔한 면을 상징하는 음식이 바로 이 쓰시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쓰시의 장점은 언제든지 운반이 가능하고,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움직이면서까지. 전세계 가전 제품 시장을 석권하는 작고 실용적인 ‘포토블’ 상품의 뒤에는 바로 이 쓰시의 음식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불과 냄비가 꼭 필요한 돼지 비계의 ‘차오’요리나 식으면 끝장인 묵직한 뚝배기의 된장찌개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투명하면서도 정갈해 보이는 일본 상품들. 사시미 조각처럼 세밀하게 나뉘어 있는 상품들과 잘 배려된 부속품들, 카메라, CD플레이어, 문구류, 옷, 심지어 장난감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놓은 진열장의 케이크와 과자들은 정성스레 저며놓은 사시미나 오밀조밀 뭉쳐놓은 쓰시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용도와 관계없이 그것을 입에 넣고 싶다는 충동까지 불러일으키는 일본상품의 내면에는 바로 사시미와 쓰시가 있다. 우리의 것은 어떤가? 김치는 첨가물을 넣고 시간이 경과해야 먹을 수 있는 식품이다. 그렇다고 중국 요리처럼 그때 그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회처럼 금방 먹을 수도 없다. 시테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반드시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김치는 전혀 경쟁력이 없는 식품이다. 또 김치는 먹는 사람 개인의 취향이나 입맛이 반영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몰개성적인 식품이다. 한 집안의 어머니 입맛이 온집안 식구의 입맛을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는 중국 음식의 권위적인 모습과 동일하다. 일본의 회나 서구의 스테이크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소스를 바꾸고, 간을 달리 할 수 없는 불박이 음식이다. 또 이런점에서 김치는 자기 집 문만 벗어나면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국제 경쟁력은 커녕 옆집과의 경쟁력도 없는 셈이다. 김치에 김밥 같은 ‘포터블’의 기능이 있는가? 아무리 비닐로 싸고 랩으로 둘러도 냄새는 삐져나온다. 그것도 국제선 기내에서는 특히 더. 우리의 찌개를 보자. 잡탕찌개, 부대찌개, 섞어찌개 등 이름부터 몰개성의 음식들이다. 먹는 사람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지 못함은 물론 재료들 각각의 맛마저 모두 찌개국물 속으로 함몰되고 만다. ‘먹으려면 먹고 싫으면 관둬’의 억지가 가득한 음식이다.

세 자루의 서로 다른 칼이 만들어낸 요리는 정치적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토막 친 돼지고기와 야채들을 한데 섞어 화르르 볶아내는 것처럼 중국의 통치는 언제나 두리뭉실이다. 법도 없고 원칙도 없고 주방장 마음대로 섞어서 볶아놓는다. 국민들은 이리 볶이고 저리 볶이면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그들의 모습, 바로 ‘차오’ 요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한국은 어떤가? 바로 김치 그 자체다. 국민들은 각각 개성이 강하고 성격도 강하다. 따로따로 떼놓으면 엄청 똘똘하다. 마치 싱싱한 배추처럼. 그러나 그 위에 소금이 한번 뿌려지면 모조리 숨이 죽는다. 언제 설쳐댔었나 싶게 엎드려 있다. 복지부동과 눈치보기가 그 전형적인 예다. 마치 김치를 담그듯이 펄펄한 배춧잎과 소금 뿌리기가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개선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사시미 그대로다.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지방 분권. 누구도 실권을 한 손에 잡을 수 없는 일본 정치의 현실은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사시미 그대로다. 국민들은 각기 살아서 바삐 파닥인다. 또 각각의 조각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나름의 일에 대해 애착을 갖고 서로의 개체를 인정한다. 하지만 결국은 접시 위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와사비 간장과 함께 사라진다. 일본인의 사회와 기업에 대한 희생 문화와 동질이다. 민족의 특성이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후천적 습성의 복합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문화권 내에서 형성되는 모든 유형 무형의 존재들의 특성을 결정짓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다. 무조건 우리 것이 좋다고 외칠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곁에서 배워야 한다.


제4부 공부는 끝났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공부해라’지만 가장 효과 없는 주문 역시 ‘공부해라’일 것이다. 학부모들이 원하는 공부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읽거나 써야 한다. 또 적당한 체크를 위해 주로 쓰기를 강요한다. 조금 양보해서 동화책을 읽으라고 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독후감이나 일기 등을 ‘쓰게’ 만든다. 체크하기 편하고, 써놔야 학습이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더욱이 논술이 대학 입시에 들어오면서 ‘쓰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나타나나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다. 수많은 정보들은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완전히 오픈되어 있다. 이제는 지식을 누가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들 지식은 과거처럼 문자 매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멀티미디어 기능을 통해, 시각뿐만 아니라 인간의 청각, 균형감각, 촉감까지 동원되어야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24시간 우리들 주변에 뿌려놓고 있다. 때문에 이제는 단순하게 글을 읽고 쓰는 능력만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 정보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정보가 어디에 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 당면한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감지하고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현실 문제들은 통합적 유기체다. 따라서 평면적인 글공부만으로는 이 유기체가 지닌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이해할 수 없다.

영어는 이미 외국어가 아니다. 영어는 이미 모든 외국어를 초월하는 국제어가 되어 있다. 국제어인 영어를 쓰지 않아서 보는 손해나 비용은 나라 전체로 볼 때 너무도 막대하다. 영어가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받아들이면서 풍부한 어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듯이, 세계를 향해 열린 언어는 결국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 인도 영어, 싱가포르 영어, 홍콩 영어에서 보듯이 모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되는 영어들은 모국어의 영역을 축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모국어에 물들며 독특한 발음과 표현들을 낳고 있음도 ‘순수국어 수비대’들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하버드의 헌팅턴은 영어가 문화와 문화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이면서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는 재미있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즉 어떤 문화권 사람들이 영어를 쓴다고 해서 생각마저 영어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언어학자 피시먼은 국제어의 조건으로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지 않은 언어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는 이제 세계어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특수한 의사소통 도구일뿐, 특정 문화만을 대변하는 언어가 아니다. 헌팅턴은 이제 영어는 인종적 특성이 거의 탈색된 탈인종화된 언어라고 말하고 이따. 실제로 외교관, 기업인, 과학자, 관광객, 관광업 종사자, 항공기 조종사, 관제요원 등은 모두 효율적인 의사소통의 언어로서 영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특정 문화에 종속되고 싶거나 종속되었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는 것이 헤엄치기에 편하듯이 영어를 그저 편리한 의사소통 도구로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그것을 너무 민족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초라해진다. 물론 우리 것, 우리말을 외치는 몇몇은 강연도 하고 책도 팔면서 자신들의 희소가치를 만끽할 수도 있지만 별볼이 없는 다수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것으로 무장된 한국인이 아닌 다른 것에 익숙한 한국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 것이 그렇게 대단하면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서라도 외국어에 익숙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모습만을 가지고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우리는 최소한 영어, 일어, 중국어 3개국어는 할줄 알아야 하는 사명을 지고 이땅에 태어났다. 힘이 약한 나라는 이래저래 숙제가 많은 법이다.


제5부 한국인을 넘어서

세계의 문이 열리고 지구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메시지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는 목소리들은 다름 아닌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것들이다. 거센 외부 물결에 휩쓸리지 말아야겠다는 옹골찬 다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물론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의 확인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아이덴티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국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땅 우에서 하늘 아래서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사는 일인 것이다. 즉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나 우리 문화 속의 한 구성원이라는 문화적 의무감보다 더 본질적이고 가치가 이는 그 무엇인 것이다. 결국 우리것 지키기의 목소리들은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의 흐름에 올라서기로 굳게 마음먹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마련이고, 도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세계 모은 ‘사람’들과의 거리도 좁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허황되게 살아왔다. 눈만 높아서 미국과 일본을 맞상대로 싸워왔다. 그네들과 상대가 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의 국방을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 시스템은 미국식이고, 거의 모든 사업제품의 설계도는 일본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무슨 일인들 올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국민소득 1만불이 안되는 나라와 3만불을 오르내리는 나라가 동일선상에 설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눈높이를 낮추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도 아시아의 경제 위기 속에 빠져들었다며 물귀신식의 일체감을 맛보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어느 외국 분석가의 말처럼 일본인들의 겸손이 가져온 자기 반성의 모습이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체중조절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 자꾸 주변의 나쁜 모습들을 의도적으로 찾으며 우리들의 못난 모습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것인가? 우리는 우선 주변의 작은 나라로부터 배워야 한다. 타이완의 유연함을 배우고 싱가포르의 깨끗함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들보다 인구도 많고 조건도 좋은 편이다. 만일 그들을 먼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점점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함(clean), 신용(credit), 야무짐(compact)의 3C다.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새마을 특실과 신칸센의 깨끗함을 비교해보라. 그 깨끗함은 비질을 자주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깨끗한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우리 모두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마음가짐에서 출발한 비질이 거리와 도시를 깨끗하게 하고 삶의 보금자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일을 할 때 가장 골치 아파하는 부분이 무엇인가? 바로 신용이다. 어제 한 말이 오늘 바뀌고, 또 내일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대기업이고 은행이고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동네 카센터 주인의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대체 신뢰를 할 수가 없다. 부품이 어떻게 필요하고, 그것이 새것인지 중고인지, 공임은 얼마인지 속시원하게 알 수가 없다. 늘 찜찜하게 속고 살아야 하는 이 사회는 우리를 너무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서로 주고받을 만큼 주고받으며 살자.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는 더 이상 탐욕과 질투 그리고 권력욕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국가적 횡포와 정치적 속임수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작지만 소중한 우리들 스스로의 삶과 주변 환경을 돌볼 시대가 되었다. 왜곡된 역사 속의 엑스트라에서 벗어나 삶의 무대의 주역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유교 문호가 낳은 왜곡된 정치적, 사회적 권위에 빼앗긴 인간다움을 되찾고 싶고, 칙칙해진 내 마음이 창을 맑게 닦으며 살고 싶다. 그 창으로 이웃들의 따스한 가슴을 들여다보며 살고 싶다. 작지만 아름다운 삶을 가꾸면서.


[ 지나가는 한 마디 ]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상품성 발언들이 많다는 생각이 젤 먼저 들었다. 지금까지 어떤 책에서도 들어본적이 없는 속어들이 서슴없이 내뱉어 지는 걸 보면서 이래서 이책이 베스트셀러가 됐구나 했다. 앞부분을 볼때는 누가 그걸 모르나... 누군 뭐 입이 없어 그런 말을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작가는 너무 우리나라의 문화를 안좋은 쪽만 보고 설사 좋은것이었을 찌라도 나쁜점만을 부각시켜 자신의 논리를 폈다. 이게 자신이 건 타이틀에 맞기 때문이고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었겠지만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한문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여 이 한자는 우리 중국의 글자가 아니라 아시아의 글자라고 하면서 이걸 배워야지만이 21세기 정보화시대를 살수 있다면서 그걸 배우기를 강요했다. 이 책에 맨 끝에 보면 이 작가가 출판예정인 한자책이 나와있는데 이 책을 보고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다 사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너무 상품성에만 의존하지 않았나 싶었다.

한국인들의 조상숭배사상이나 온고지신 사상같은 경우를 비판하면서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폐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을 어찌 하루아침에 버릴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사상과 함께 살아왔음으로 이것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라 할수 있는데 구체적 방안제시 없이 그저 나쁘니 버리고 외국을 따르란 것인가? 저자가 바라는 깨끗한 세상, 투명한 경제가 운영되는 세상을 충분히 바라고 그렇게 되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만은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문화를 꼭 버려야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조상을 숭배하면서 그런 나라는 불가능하고 옛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 그런 투명한 경제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저자의 책을 전반부를 넘겼다.

하지만 점점 읽을수록 저자가 주장하는 논리에 저절로 빠져드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저자를 비판하면서도 저자가 이렇게 밖에 말할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너무나도 유교사상의 악영향이 많이 끼쳐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읽어 갈수록 진짜 우리나라가 유교문화에 대한 대개혁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되었다.

먼저 저자가 지적한 한국인으로 사는 열가지 괴로움에서 술 한잔이 나라를 망친 나라라는 부분을 읽었을때는 진짜 그 말에 동감하면서 우리나라의 이러한 관행이나 현실이 너무나 슬펐다. 공짜를 너무나 좋아하고 회식을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 더치페이를 정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누군가가 돈을 내기를, 또는 회사에 생긴 공돈으로 누가 먹여주기만 바라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정신개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 한끼의 저녁회식을 위해 빼먹은 철근이나 콘크리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이 생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우리 실상을 볼 때 이를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이런 뇌물이 나가지 않고는 공사를 따낼수 없는 관행 속에서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개혁해 내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한사람으로는 택도 없는 일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이 모아져서 이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너무 늦어버릴 것이다.

이런말은 쓰고 있으면서도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공무원들이 누군 몰라서 안하냐는 핀잔이 들려오는 것 같다. 너무나 식상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일은 꼭 이뤄져야 한다. 너무 뿌리깊게 박혀져서 개개인으로서는 해결이 될 수 없다면 정부적 차원에서 좀더 강화된 처벌법이나 아니면 공무원들의 도덕교육이나 그들의 책임의식을 더욱 강조시켜야 할 것이다. 엊그제 학교 앞에서 무슨 건축 자격증을 구합니다라는 문구를 읽게 되었다. 다른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선지 진짜 이래서 우리가 안되는 것이라는 분노가 일었다. 그게 가당키나 하는 말인가? 뭐 지금까지 통했던 수법이고 그걸 빌려주는 대학생들이 있음에 대학교 앞에 그걸 붙였을텐데 그들의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곧 있음 사회에 나가서 우리 사회를 책임져야 하는 대학생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법관이 되겠다고 그저 고시원에서 책만 붙들고 사는 학생, 또는 의대생이라고 그저 어려운 의료용어만 외우고 있는 학생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우리사회가 더욱 발전하는 방향으로 바뀔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신의 행복보다는 다른사람의 행복을 더 생각할줄 아는 우리 학생들이 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번째로 이 작가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식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놓은 것이 있다. 그 나라의 환경적인 조건을 잘 고려해서 그 나름대로의 생각을 써놓았는데 너무나 당연한거 같으면서도 모든 것의 문제를 그 사소한 식칼하나에서 끄집어내는 작가의 통찰력에 너무 감탄했다. 우리나라의 불투명한 경제를 우리의 식칼의 용도에서 나온것이었다. 사시미 회를 뜨거나 돼지비계를 짜르기에 부적합하게 설계되어 있는 우리의 식칼은 배추나 무를 자르기에 적합하게 되어서 혼자서는 뭐든지 할거 같이 파릇파릇 살아있는 배추지만은 소금만 뿌려지만 풀이 죽어서 서로 눈치보기 바쁜 우리의 사회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진짜 혼자는 너무 똑똑하지만 군중에 뭍히기만 하면 소리가 없다. 그리고 너무 허례허식을 챙긴다. 모른 것을 모른다 하기보다는 안다고 거짓말을 치는 그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것에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다. 모르면 배우면 되지라는 사고보다는 모르는 것은 근처에도 가기 싫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런 사고는 과감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저자가 너무나 과감한 말로 한국인을 비난했듯이 이런 우리의 사고는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너무나 비굴할 정도로 낮아져서 모르는 것을 배우고 그걸 다 배웠으면 자기것으로 소화시켜 더욱더 발전시켜 그것을 모르는 나라에게 팔아먹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금의 세계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수 없는 세상같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여 무한경쟁사회에서 우리것만을 지킬려고 하기보다는 다른나라것을 수용하여 우리나라화 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나라가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인 것 같다.

세 번째로 영어배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써있는 부분이다. 그부분에서 작가는 영어를 세계공용어로 쓰는것에 대해서 수영장에 가면 수영복을 입어야 더 편한것처럼 그냥 우리가 편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너무 좋았다. 그 말은 너무나 이해하기 쉽고 왜 배워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명언이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것이 취업하기 위한 그리고 세계강국의 언어이기 때문에 무조건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계는 세계화 시대라고 하여 여러나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인데 이런 시대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언어를 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것을 세계화 시키면 되지라는 억지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나 우리 나라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아직 우리는 너무 힘이 없다. 그러므로 힘을 더 키우고 나서 그런말을 하면 모를까 아직은 가당택도 없는 그런말을 남발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으면 안될 것이다.

이책을 통해서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던 우리나라의 사상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진짜로 이런것들이 바꿔야지만 우리나라가 사는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이 작가의 과감한 말투나 표현으로 인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지식인들이 읽게 됐다는 것이 넘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했던것들을 조금씩이라도 실천해서 우리나라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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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쉽사리 바뀔거 같지 않은 유교문화의 근간이지만,
    그래도 조금의 변화의 조짐도 보이는거 같아요.
    좋은것은 살리되, 버려야 될 건 가감히 버려야 할 자세도 필요할 것으로 보여요

    • 하늘날아 2011/04/18 13:00

      옳은 말씀입니다. ㅎ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유교문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좋은 것만 남겨 두면 좋겠어요..ㅎ
      행복한 하루 되세요^^

  2. 2011/04/18 13:17

    비밀댓글입니다

    • 하늘날아 2011/04/18 13:22

      아..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결국은 키워드라는 거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3. 책 소개 감사합니다.
    단숨에 바뀌지는 않더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해요 ㅜ

    • 하늘날아 2011/04/18 13:25

      네 감사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고요..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 변화가 가장 우선하지 않나하는 생각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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